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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미술로서의 타이포그래피

05/15/2018

 인간의 생활 속에서 언어의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의사소통을 위한 약속,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가리키는 등의 목적이나 편의를 넘어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사랑을 고백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욕설을 퍼붓기도 하며 시,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남기기도 한다.

 

  많은 화가들이 정보 전달의 기능을 배제시키며 장식적 수단으로서의 글자의 아름다운 조형성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어떤 식이든 타이포그래피를 차용하는 그들에게 글자 자체가 갖는 의미는 그림이기에 갖는 조형성 못지 않게 중요하다. 아마도 그들 중 대다수가 작품의 글자들이 갖는 언어적 의미에 의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깊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또한 보는 이들이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연상 작용에 대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에 어원을 둔 영어 표현인데, ‘impression’의 의미를 갖는 ‘typos’와 ‘writing’의 의미를 갖는 ‘graphia’의 합성어이다. 이런 연유에서일까? 타이포그래피는 순수 미술 뿐만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애니메이션, 만화책, 그래피티 등 현대의 많은 예술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언어’라는 소통의 수단이 ‘미술’이라는 시각적 표현을 위한 더욱 강력한 매체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를 예술로 승화시킨 선구자들 중 하나인 프랑스 작가, 프란시스 피카비아(Francis Picabia)는 예술 잡지 등 실용 미술에 있어서 감정의 표현에 보다 중점을 두어 디자인을 순수 예술의 반열에 올린 것으로 평가받으며 데이비드 살레(David Salle),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 등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Francis Picabia, lci, c’est ici Stieglitz, foi et amour, cover of 291, No.1, 1915

 

 

 

Francis Picabia, Reveil Matin (Alarm Clock), Dada 4-5, No. 5, 15 May 1919

 

 

 

 미국의 작가 크리스토퍼 울(Christopher Wool)은 흰 캔버스 위에 스텐실로 완성한 검은 글자 작업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러한 글자 작업들을 흰 트럭 위에 쓰여진 그래피티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만들기 시작했는데, ‘Run Dog Run’, ‘Sell the Car, Sell the Kids’ 등의 글자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Christopher Wool, Apocalypse now, 1988

 

 

 

 브루스 노만(Bruce Nauman)은 ‘백 개의 삶과 죽음(One Hundred Live and Die)’이라는 재미있는 제목 하에 ‘Live and die’, ‘Live and live’, ‘Sleep and live’, ‘Know and live’ 등 백 개의 문구를 네온사인으로 만들어 전시하였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업이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만든 것이라 이야기한 그는 ‘장미는 이빨이 없다(A rose has no teeth)’라는 전시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게임’(Language game), 즉 여러 단어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 믿음, 그 상호 연관에 의해 유추할 수 있는 의도의 형태가 있음을 시각화하였다. 

 

 

Bruce Nauman, One Hundred Live and Die

 

 

 

 작품을 통해 이 천재적인 철학자의 사유의 방식을 상기시키는 또 한 명의 작가가 있다. 문을 닫은 담배 공장의 사원 아파트를 개조해서 만든 전시 공간의 개관미술전에서 타이포그래피의 요소를 보여주는 일련의 회화, 오브제 등을 선보인 대구 작가 정인희인데, 그녀는 자주 감방처럼 느껴지는 작업실에 스스로를 가두고 철 지난 일기, 좋아하는 책 등을 필사하며 지나간 시간을 붙잡기라도 하듯 일상을 채운다. 마치 비트겐슈타인이 이야기하는 그림 이론(Picture theory), 혹은 언어 게임(Language game)처럼 ‘Pink=춤, Yellow=들놀이, Blue=사랑, Black=밤, Green=메모, Orange=일기’의 식으로 자신만의 조형 언어를 만들어 있기도, 없기도 한 본질의 주변을 서성이며 그것에 대한 어떤 유사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야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침묵하는 대신 서로 상반되는 그림 이론과 언어 게임의 접점을 찾기라도 하듯 작업을 통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 끊임없는 현재 등을 염원하며 진정한 자아와 조우한다.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리알티(Artist-run space, Realti)에서는 이토록 매력적인 타이포그래피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는 워크샵을 여섯번째 와인 앤 페인팅 나이트(Wine and Paint Night)의 주제로 선정하였다. 오는 5월 19일 7시부터 진행되는 워크샵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소통의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죽은 언어들을 깨울 수 있는 진정 의미있는 경험이 되어줄 것이라 확신한다.         

 

 

 

 

Inhee Jeong, The Prison Notebook, Typographic installation, 2017

 

 

 

Inhee Jeong, The Prison Notebook, Typographic installation, 2017

 

 

Inhee Jeong, The Prison Notebook, 60, 90.5cm, Acrylic on tin plat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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