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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굿 엔딩 – 안은지 작가의 작품 세계에 관해서


예술에 있어 ‘성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공적인 예술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회화에 있어 좋은 작품은 어떤 작품을 말하는 것일까? 예술에 있어서의 성공과 관련되는 여러가지 요소들 중 중요하다고 간주되는 시각적 결과물로서의 회화의 완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대로부터 예술가는 광인 취급을 받거나 사회로부터 도외시되곤 하였다. 시인들이 사회에서 추방되어져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던 때부터 지금까지 예술가는 예술을 통한 그만의 자기 향유로 인해 다른 부류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받곤 한다. 그러나 밥은 먹고 다니느냐는 질문을 받을지언정 그러한 자기 향유로의 무한 도피는 매우 낭만적이다. 그 속에 존재하리라 믿는 무언가 절대적인 자신만의 세계, 신기루와도 같은 그 피안의 세계 속에 어쩌면 우리 모두가 염원하는 종교와도 같은 진리가 숨어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세계를 나름의 형식으로 가시화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예술가는 나름의 존경을 받는다. 예술작품에 쓰여지는 주제나 소재에 있어 더 이상 어떠한 제약도 남아있지 않은 것만 같은 이 시대를 살면서도 그것이 순수한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 아니면 어떤 다원주의적이고 상대적인 사상들을 포함하는 것인지에 따라 우리는 작품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안은지의 달라진 최근 작품의 경향은 예술이 의지의 문제인지, 가능의 여부에 달린 것인지, 혹은 모방인지 추상 충동에 의한 것인지에 관한 경계를 무색하게 하는 듯 하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의 이전 작품에 이미 존재하던 어떤 경향들이 진화, 발전된 형태이므로 그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변화와 귀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전의 작품들이 형상과 그것을 통해 파생될 수 있는 감정의 분석이나 전달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에 반해 최근작은 추상 회화에 나타나는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그러한 그녀의 빠른 필치와 과감한 색의 사용은 미국의 미학자, 엘렌 디사나야케(Ellen Dissanayake)가 이야기하는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즉 인류의 발생의 근원으로서의 ‘미학적 인간’을 떠올리게 하는 보편적이고도 본능적인 요소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러한 그녀의 새로운 시도를 흥미롭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안은지 작가는 대구에서 자라 영남대학교 서양화과를 거쳐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교에서 수학하였고 현재는 한국에 거주하며 작업하고 있다. 그녀는 일상적이거나 혹은 비일상적인 여러 인물, 정물, 풍경화 등을 빠른 필치의 소묘, 수채화, 유화 등으로 작업하며 다양한 표정과 제스처를 화면에 담아내는데, 그로 인한 우연의 효과는 기대하지 못했던 보다 흥미로운 시각적 요소를 화면에 부여해 준다. 가벼운 듯 깊이 있는, 우울한 듯하면서도 풍자적인 그녀의 화풍은 그것이 사소한 종이 작업이라 할지라도 관객을 마구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을 갖고 있다. 아마도 그녀의 최근작은 이전의 몽환적, 재현적인 형상을 과감하게 무너뜨리고 이러한 우연의 효과와 자유로운 색채의 사용에 더욱 몰두한 새로운 시도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이전의 작품들에 나타난 경향들과의 연결고리를 굳이 찾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워 보일 테지만 또 다른 이에게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우리는 자주 어떤 사람의 성장과정이나 주변 환경을 분석함으로써, 또는 역사적 사건들과 그 축적으로 인해 공통적으로 갖게 되는 기준들을 가지고 어떤 사람을 판단하곤 한다. 안은지 작가가 당시에 어떤 작품들을 좋아했는지, 독일 유학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나 그녀가 독일에 머물렀던 9년이라는 긴 시간은 그 장소의 특징, 독일인이라는 민족이 공유하는 어떤 집단적 특징들을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도록 해 주었을 것이다. 그녀의 많은 작품들이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독일의 표현주의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고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 또한 자신의 불안과 우울을 그림을 통해 해소하고자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있어 애초에 독일의 표현주의가 왜 발생했으며 그것이 얼만큼이나 ‘추상’이라는 형식과 연관이 있는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술이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관한 표현이라는 것과 왜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은 나의 신념 혹은 종교’ 라고 표현하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추상이든 표현주의든, 예술의 형식을 결정하게 되는 근원 중의 하나는 변화무쌍한 자연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공포와 두려움일 수 있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 신석기 이후의 원시적 기하학 양식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문명이 시작되는 단계에서는 늘 추상적 표현 양식들이 발전해 왔다. 아마도 이집트 인들은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 한 가운데에서 느끼는 심리적 공포감을 그러한 추상 충동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존 듀이(John Dewey)는 그의 책, ‘경험으로서의 예술(Art as experience, 1934)’에서 “산업이 점차 기계화되어 가지만 예술가는 작품의 제작을 위해 이러한 기계적 대량 생산의 방식을 취할 수 없다… 예술가들의 창작은 고립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경제력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에 동조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종종 기괴할 정도로 자신의 고립감을 과장되게 표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곤 한다.” 라고 적고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에 대한 불신과 그로 인해 느끼는 공포감을 표현한 것이 독일 표현주의의 추상적, 비현실적인 양식이라고 한다면, 원시인들이 자연을 대하며 느낀 불안과 추상 충동의 결과물로서 표현한 기하학적 양식이 그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예술이 시간을 초월한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아무 것도 재현하지 않는 순수한 형식을 통해 물질 세계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정신성에 입각한 보다 우월한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면 시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현세에 대한 불안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충동이 많은 예술가를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존재하는 보편적인 감정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사람들이 세계와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종교를 찾거나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나오는 무진과도 같은 자신만의 어떤 공간을 동경하듯 예술가들 역시 그러한 불안을 해소하고자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소우주를 창조해 낸다. 어쩌면 많은 예술가들이 천착했던 ‘추상’이라는 형식 속에 문자 그대로의 종교적인 신비스러운 어떤 힘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Piss Christ’로 유명한 안드레 세라노(Andres Serrano)와 같이 종교적 상징물을 조롱하는 듯한 작품으로 공분을 샀던 많은 예술가들도 맥락에 따라 ‘교회’라는 기관과 잘못된 믿음에 대한 비판을 통해 종교에 대한 신앙심을 더욱 고양시킨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물론 그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자 한 시도였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가 모두 거장이라 일컫는 프란시스 고야(Francisco Goya)조차도 극악무도한 전쟁의 공포를 표현하거나 제 자식을 잡아먹는 신화의 인물 묘사를 통해 보는 이들을 충격에 빠뜨린다. 보다 통속적이라 생각되는 팝 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Andy Warhol) 역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의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생산해내어 본래의 의미를 제거하고 ‘종교와 상업주의’를 표방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냈지만 그는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찬이며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작업에 임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종교에 있는 무언가 간절한 요소. 실제로 절대적인 힘을 갖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많은 수의 이론가들이 예술이 이러한 원시적인 의식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입장을 지지한다. 풍부한 색감과 화려한 디자인 요소들을 보여주는 세계 곳곳의 많은 종교적 의식들이 이를 증명한다. 일상적인 오브제들과 제스처들이 공통된 믿음을 통해 상징적인 중요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이 정확히 무엇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많은 수의 예술가들과 관객들이 그것을 통해 위로받고 성장하고자 한다.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는 그의 소설 ‘The witch of Portobello’에서 “만약 연극이 의식이라면, 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를 세계와 연결시키는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괴롭히는 의식과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는 행위와 같다. 그러므로 춤을 추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진정한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라고 말한다. 비현실적인 구도와 색채를 사용한 그녀의 이전 작품에 이미 불안과 두려움의 흔적이 짙게 베어 있지만 혹시 안은지 작가는 보다 강한 두려움을 새 작업을 통하여 더욱 힘있게 극복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자유롭게 물감을 바르고 흘러내리기도 전에 롤러로 문지르거나 밀어버리는 행위들은 결국 그것을 통해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현실에 대한 불안과 세계의 불확실함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예술의 성공은 그 기준을 어떻게 상정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힘들고 고달픈 작업 과정이 한편으로 너무도 재미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어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더 이상 아름답거나 도덕적일 필요가 없고 아서 단토(Arthur Danto)가 지적하듯 신에 대한 제헌도, 천재임을 증명하기 위함도 아니요, 반드시 연극, 그림, 원예, 성당이나 사원 짓기, 혹은 오페라 등의 특정 장르일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많은 예술가들을 그만의 소우주로 이끈다. 그러한 충동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완전히 소진할 때까지 멈출 수 없을 것 같이, 아침 일찍 작업실에 왔는데 어느 새 어둑어둑해져버린 것을 깨닫고 놀라는 것처럼 예술은 어쩌면 그 시작도 끝도 없는 무언가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많은 화가들이 작품 하나를 완성한 뒤, 혹은 전시회를 오픈한 뒤 허탈감에 휩싸이곤 한다. 어떤 그림들은 그 과정이 어떠했을지에 대해 상상하는 것만으로 보는 이들을 함께 가슴 뛰게 만들기도 하는데 금방이라도 물감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이 작가의 필치가 강조된 그림, 혹은 얼마나 많은 겹의 물감이나 기름을 발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울림이 강한 그림 등은 왜 작가들이 그림을 완성하고 나서 마치 탈피하는 곤충처럼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자신의 작업이 몸에 관한 것이고 작업의 행위가 한 편의 연극 혹은 의식과도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작가, 타라 도노반(Tara Donovan), 마치 수행이라도 하는 듯 꿇어 앉아 수도 없이 밑작업을 했었을 수많은 한국의 단색화가들 등 많은 수의 예술가들에게 이는 단순히 ‘그림 그리기’의 행위 이상이요, 감정의 통로였을 것이다. 저마다 종교나 취향이 달라도 무언가 공유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감정, 불안감, 황홀감, 두려움, 설렘 등이 예술에 투영되어 많은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다.

안은지 작가의 화면에 나타난 화려하고도 쓸쓸한 색채와 그 투박하고도 미세한 움직임에 대해, 그 아름다움에 대해 동료 작가로서, 친구로서 누구보다 격하게 공감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참 어렵다. 더구나 ‘굿 엔딩’이라는 제목은 오히려 구질구질한 현실을 잊고 그림 속에 영원히 머무르고자 하는 화가의 마음을 역으로 표현한 것만 같아 더욱 짠하다. 나의 공감을 그대로 드러내보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고 아쉬운 마음에 영국 BBC 방송에서 미술사 강의를 했던 웬디 베켓(Wendy Beckett) 수녀님의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인용하고자 한다.

“관객들이 Mark Rothko 의 회화를 두고 아름답지 않다고 여길까봐 두려운 게 아니예요. 제가 두려운 것은 그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예쁜 색을 가진 보통의 아름다움이 있는 그림으로 치부될까 하는 것입니다. 그림의 의미와 주제는 그에게 전부였지요. 그리고 그 주제는 인간의 감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다르게 느끼는 희노애락 이상의 보다 큰, 시간을 초월하는 그러한 감정들, 이를테면 우리가 죽음에 대해 느끼는 것, 용기나 황홀감 등이 그것이라고 할까요? 그는 자신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 누구에게라도 이러한 것들이 절대적 명료함으로 전달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더욱 더 큰 그림을 그렸지요. 그림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려고… 종교적 상징이 없는 종교적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다시 나 자신을 속세로 돌아오게 만들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리알티(Artist-run space Realti) 대표, 김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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