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수히 많은 발전과 진화를 거쳐 현재를 살고 있는 듯 하지만 실은 미술의 역사 속 어느 시기에나 ‘혁신’이라 할 수 있는 시기 혹은 계기들이 있었을 것이다. 선사시대의 동굴 벽화 이후 문명이 발생하며 미술은 긴 듯 짧은 듯, 느린 듯 빠르게 지금의 양상으로 그 역사를 일구어 왔다.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있는 그대로, 혹은 그보다 더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했던, 어쩌면 그저 낭만적일 뿐인 제우스 신화를 구체화하기라도 하듯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위대한 건축물이며 회화, 조각 작품들이 무수히 축조되었다. 고전주의 양식은 사실주의가 아니라 사실주의를 가장한 이상주의라고, 아니 그 심한 아름다움으로 유일무이한 ‘이상’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조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란 무슨 뜻일까? 미술 용어로 자주 등장하는 ‘재현’의 의미는 이제 너무도 많은 것을 포용한 나머지 그만 죽어 버린 단어이다.
‘재현’은 오랫동안 서양 미술사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화두였다. 아마도 인간과 자연이 하나였던 때, 신과의 소통에 있어 어떤 다른 종교나 언어도 필요치 않았던 시절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해 그것은 무수히 많은 예술 작품 속 주된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술 작품들에 대한 존경, 진화로 인해 사각형의 린넨 천 위에 정체를 알 수도 없는 떨칠 수 없는 기운이 망령처럼 자리하는 것, 이른바 많은 작가들이 겪는 공통 증상인 흰 캔버스 앞에서의 공포의 원인이 되어 버렸다. 기술의 발달이 가져다 준 흥분과 회의는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길을 찾는 것에 골몰하도록 만들었다. 동시대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작가 황미정의 작품 또한 여러 굴곡과 진화를 거쳐왔다. 그러나 그녀의 회화 작품이 더욱 주목 받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자신이 사용하는 매체를 잊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디오 아티스트로 유명한 백남준에게 부여되는 수식어들 중 하나는 ‘테크놀러지’이다. 그는 티비 박스들을 조각으로 만들며 새로운 미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기술’, ‘진보’ 등의 용어는 사실 수백,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회화의 역사를 의식하며 여전히 캔버스 앞에 앉아 있는 화가들에게 어쩌면 불편한 단어들이다. 많은 화가들이 흰 캔버스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하나의 손 같은 것을 느낄 것이다. 그 안이 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 말이다. 재현에 입각한 회화나 조각들은 한때 역사 속 인물들의 존재 증명이었고 자신의 삶을 지속하게 하는 정신적인 지주였다. (선대의 임금의 허리띠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후손을 보라) 사진의 발명을 회화의 퇴보라 여기지 않고 초상화를 진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던 최초의 사진가들은 어쩌면 사진과 회화를 하나로 본 급진적인 예술가들이었을 것이다.
황미정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이어 오고 있는 재료들, 물감, 팔레트, 테레핀과 린시드 등 화방에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는 재료들, 많은 작가들이 간과할 수 없는 그들에 대해 인생을 걸고 연구하는 작가이다. 그녀를 보면 인상주의 화가들이 떠오른다. 처음 발명된 튜브 물감들을 가지고 들떠서 야외로 나섰던 그들에 대해 상상하게 만든다. 튜브 물감은 그야말로 혁신이었을 것이다. 모네가 그린 수많은 건초 더미들이 그토록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튜브 물감이 가져다 준 이점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장미에 골몰하는 것이 장미가 사람처럼 보인다는 이유에서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사무친다. 모네 역시 그랬음에 틀림 없다. 인상주의자들이 튜브 물감을 통해 재발견했던 빛과 색채의 표현은 물감을 비롯한 재료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녀가 일생에 걸쳐 터득하고 이루는 자신만의 ‘의미화’의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꽃을 그린다. 우리는 아름다운 이를 꽃 한 송이에 비유하곤 한다. 그녀의 눈에 비치는 꽃송이들이 우리 개개인의 영혼일 수 있을 것이다. 순진한 분홍색뿐만 아니라 연한 보라색과 파란색이 꽃잎에, 반사광에 자유롭게 스며 있는 것을 보며, 그들을 조율해 내는, 마치 숙련된 요리사 같은 황미정 작가의 땀방울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것이야말로 미국의 극사실주의를 흉내 내던 우리 화단의 꽃이나 과일 그림과의 차별성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글 김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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